산/산행..

덕유산 (향적봉 1614m)_09년 일월 열하룻날

청산리 벽계수 2009. 1. 12. 13:26

 눈꽃산행

덕유산르포

눈꽃과 겨울산의 정수를 맛보다

구천동계곡~향적봉~백암봉~신풍령 종주산행

 

   봄꽃인들 이보다 화사할 수 있을까. 여름 꽃인들 이보다 탐스러울 수 있을까. 가을꽃인들 이보다 가냘플 수 있을까. 향적봉 눈꽃은 하나 하나 달랐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주목에 켜켜이 달라붙은 눈은 천 년의 눈이었다. 이제 12월 초인데도 구상나무는 벌써 크리스마스 준비를 마친 상태이고, 철쭉나무는 초여름의 화려함 대신 순백의 세계를 펼쳐놓고 있었다. 감탄케 하고, 들뜨게 하고, 혹 떨어뜨릴세라 조심스럽게 했다.

   화려한 눈꽃 세상은 구름안개가 한바탕 몰아치자 일순 괴이해졌다. 싸늘해졌다. 모든 것, 세상이 얼어붙은 듯했다. 마음도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러다 먹장구름 사이로 한줄기 빛이 쏟아져 내리자 또다시 보석처럼 빛났다. 동시에 우리의 얼굴도 꽃처럼 환해졌다. 또다시 바람이 분다. 그러자 눈가루가 얼굴로 퍼부었다. 눈꽃비였다.

   강추위 속에서도 동화 같은 풍경

   구천동계곡은 이미 깊은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골짜기 바위도 흰 눈옷 입고, 계곡 물은 얼음 옷을 입고 있다. 그래도 물소리는 변함없다. 크고 작은 바윗덩이 사이를 비집고 높고 낮은 턱을 넘고 넘어 깊고 얕은 소로 떨어진다. 사흘 전, 그리고 엊저녁 내린 눈이 제법 두텁다. 뽀드득 소리내며 걷는 눈길은 언제나 새롭고 싱그럽다. 그래서 등산인들이 특히 겨울 산을 좋아하는가 보다.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에 도착했을 때는 찬 바람이 쌩 불어대어 어깨를 움츠리게 하더니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살짝 누그러진 날씨에 힘이 솟는다. 늘 어둑할 즈음 지나치는 바람에 지루하게 느껴졌던 구천동 길이 호젓하기 그지없다. 인월담, 청류동, 비파담, 다연대, 구월담 등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절경지 대부분이 얼어붙거나 눈이 덮여 제 모습은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나 청초함으로 마음을 휘어잡는다.

   호젓하고 멋스런 눈길을 두어 시간 따르자 백련사 일주문이 앞에 우뚝 서 있다. 문 안에 들어서서 뒤돌아서는 순간 딴 세상이 펼쳐진다. 또 한 해가 저렇게 문밖으로 사라지는구나 싶다. 백련사 절집에 올라서자 마음이 편히 가라앉는다. 돌계단 밟고 천지문을 지나 대웅전을 마주보니 부처의 너그러움이 느껴지면서 얼굴이 펴지고, 돌아서자 품 넓고 부드러운 덕유산 산자락이 마음에 와닿는 듯해 넉넉해진다.

   휑하니 불어대는 찬 바람에 발길을 옮겨 산길로 접어든다. 백련사 계단을 지나자 나무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야트막한 나무들은 가지마다 고운 눈꽃을 피우고, 파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자란 참나무들은 가지마다 겨우살이들이 파릇한 꽃을 피운 채 겨울을 구가하고 있다. 눈 덮인 능선을 걷는 우리는 한 명 한 명 꽃송이 같다. 하얀 도화지에 오색 물감 묻힌 붓으로 터치한 꽃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랫말이 허사는 아닌가 보다.

      설화터널을 지나 눈꽃이 도열한 눈길을 가로질러 향적봉 기슭에 도착하자 동화 속 난쟁이 오두막 같은 향적봉 대피소가 반겨준다. 흰 눈으로 곱게 장식한 산장 안에는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산사진 하는 이들이다. 어젯밤 눈이 내린다는 소식에 올라왔단다. 곤돌라 타고 쉽게 올라올 수 있고, 잠자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겨울이면 향적봉 산장은 평일에도 사람이 많은 편이다. 모두 들떠 있다. 일출, 아침햇살에 천상의 보석처럼 반짝일 눈꽃과 상고대를 기대하며.       산장으로 돌아가자 눈꽃을 기대하던 산사진가들 역시 맥 빠진 표정을 짓더니 이내 포기하고 일상적인 얘기에 열을 올린다. 사뭇 허황되기도 하고 솔깃하게도 하는 얘기를 들으며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고, 그렇게 제법 긴 시간을 보내는데도 안개는 벗겨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늘 정도면 최고의 상고대랍니다."

      눈꽃 숲은 아늑하지만 눈꽃 밭을 벗어나자 강풍이 기다리고 있다. 손끝이 금세 얼어오고 얼굴이 깨져나갈 듯 강하고 매서운 바람이 분다. 콧구멍 속의 코털도 쩍쩍 달라붙는다. 그런데도 향적봉 일원은 시끌벅적하다. 곤돌라 타고 올라온 이들의 감탄 어린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숲터널 빠져나가는 우리 얼굴에도 함박꽃이 피어난다. 그러다 천 년의 눈이 켜켜이 달라붙은 주목을 보면 신비함과 아름다움에 눈이 휘둥그래진다.

   "눈꽃 좀 따먹어볼까."

     

   향적봉대피소 관리인 박봉진씨

   "준비 철저히 하고 눈꽃 촬영 나서세요"

   향적봉 대피소는 겨울이면 바빠진다. 한낮에는 눈꽃 구경하겠다고 무주리조트 곤돌라를 타고 올라오는 이들로 북적이고, 밤이면 새벽 일출이나 눈꽃 촬영을 위해 찾는 이들로 가득 차곤 한다.

   "사진을 너무 인위적으로 '포샵'하는 사람들을 보면 못마땅하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답게 촬영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향적봉대피소 관리인 박봉진씨(50세, 남원산악회)도 산사진에 조예가 깊다. 산사진가 장국현 선생에게 한동안 사사받은 박씨의 사진 가운데는 아무래도 덕유산 게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필름카메라 대신 디지틀카메라가 대세를 이루고, 사진을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포토샵 프로그램이 많아지면서 사진을 인위적으로 만지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 그는 지금도 필름을 사용하는 아날로그 카메라를 고집한다.

   박봉진씨는 간혹 장비도 경험도 없이 눈꽃 촬영에 나섰다 곤욕을 치르는 이들이 많다고 주의를 준다. 영하 20~30℃로 떨어지는 날씨에 장갑을 끼지도 않은 채 쇳덩어리나 다름없는 카메라를 만지다가 동상에 걸리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산사진 촬영으로 병을 고친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어떤 분은 동상에 걸려 하산했는데도 다음 주에 또 올라온답니다. 눈꽃이 눈에 어른거려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면서요. 칠순 노인 한 분은 뇌졸중을 지니고 있었는데, 산사진 찍겠다고 산을 오르내리다 지병을 고쳤답니다."

   고향인 남원을 떠나 구천동 입구에서 식당과 여관업을 하던 2000년 우연한 기회에 대피소 관리를 맡게 된 박씨는 "산 아래로 내려섰다가 누가 돈을 얼마만큼 벌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자신이 초라해지면서 갈등을 느끼기는 하지만 다시 향적봉에 올라서면 산속에서 이렇게 생활한다는 게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2003년 아콩카구아(6,959m)를 등정하고, 2006년에는 에베레스트(8,848m) 원정에도 참가할 만큼 전문산악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박봉진씨는 "5년 전부터 산사진 촬영에 빠진 이후 촬영해온 작품 가운데 2003년 여름 장마철에 촬영한 '여명'과 2005년 12월 촬영한 '일출'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눈꽃 촬영적기를 1월로 꼽았다.

   *산행길잡이

   향적봉~신풍령 구간은 적설량에 따라 시간 좌우

   무주리조트 곤돌라 이용, 600m 오르면 향적봉

   덕유산 눈꽃 산행의 절경지는 향적봉~중봉 일원이다. 주목, 구상나무, 철쭉나무에 켜켜이 쌓이는 눈꽃과 상고대는 그야말로 덕유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절경이다. 눈꽃은 특히 이른 아침에 햇살 아래서 절정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향적봉대피소에서 하룻밤을 지내거나 혹은 이른 아침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을 거쳐 향적봉에 올라야 한다.

   눈꽃 산행이 주목적이라면 산행을 길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향적봉 일원에서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눈꽃을 감상한 다음 백련사~구천동계곡~삼공리 코스(약 3시간 소요)나, 중봉~오수자굴~백련사~삼공리 코스(약 4시간 소요)를 따르면 3~4시간이면 하산할 수 있다. 무주리조트에 승용차를 세워놓았을 경우 리조트의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동엽령을 거쳐 칠연계곡을 따라 안성쪽으로 하산(3시간30분 소요)할 수도 있으나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취재팀이 답사한 중봉~백암봉~지봉~신풍령 코스는 눈길이 나 있더라도 7시간은 잡아야 하는 긴 코스다. 단, 폭설 직후에는 시간 가늠이 어려우니 적은 인원으로는 들어서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또한 힘들다 싶으면 백암봉(송계삼거리)에서 3.2km 거리인 횡경재 삼거리에서 송계사 방면으로 하산하도록 한다.

   덕유산은 눈과 바람이 많은 산이다. 따라서 가벼운 눈꽃 산행에 나서더라도 방풍 보온의류에 신경을 쓰고, 특히 신풍령까지 종주산행을 계획할 경우 덧바지와 스패츠를 꼭 준비하도록 한다. 또한 열량 높은 간식은 물론 따뜻한 물이 담긴 보온병을 휴대해야 위급 상황을 막을 수 있다.

   무주리조트 곤돌라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수시 운행한다. 왕복 11,000원, 편도 7,000원. 무주리조트에서 노선버스가 운행하는 삼공리까지는 셔틀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곤돌라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운행하지 않으니 무주리조트(063-322-9000)에 사전에 확인해야 한다. 설천봉 레스토랑(063-320-7717)에서는 비빔밥, 돈가스, 모듬버섯국밥(각 10,000원), 파전, 도토리묵, 흑돼지 등의 안주류를 내놓는다. 동동주, 정종, 생맥주와 같은 주류도 있다.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문을 연다.